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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교 본문내용

베드로(1), 물질보다 사람이 먼저다

2019-01-25 17:21:59
설교본문 (눅 5:5~11)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인생의 가장 큰 복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리 삶에 주어진 수많은 복이 있습니다. 그중에 소중한 복이 있다면, ‘만남의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맛깔나게 하며 살맛 나게 하는 복이 사람과의 만남의 복입니다. 

먼저 우리 스스로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과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부모님을 통해 사랑을 배웠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방법도 터득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삶이 얼마나 축복인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만남을 잃을 때 고아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종종 “나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신 것은 사랑의 만남을 상실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부모와의 만남이란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인생의 복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선택한 ‘친구와의 만남’도 있습니다. 또래 친구가 있고, 동네 친구도 있으며, 학교 친구도 있고, 직장 친구 및 취미생활을 나누는 친구도 있습니다. 이러한 친구를 통해 삶이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이요, 사람은 함께 사는 존재라는 것도 깨닫습니다. 때로는 친구와 다투기도 하고, 친구 때문에 상처 받기도 하지만, 함께하는 즐거움이 크다는 것을 알기에 친구를 계속 만나고 사귀는 것입니다.

또 ‘연인과의 만남’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결혼도 하고 배우자를 얻는 축복도 얻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웁니다. 강렬한 사랑의 경험을 연인과의 만남에서, 또 배우자와의 결혼생활을 통해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만남을 통합하는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먼저 가르쳐 주신 것은, 주님을 믿으면 주님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사랑은 당신의 아들마저 보내며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임을 주님께서 친히 알려 주십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친구의 사랑도 배웁니다. 예수님이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입니다. 또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 놓으신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어떤 친구 관계가 진정한 친구 사이인지, 또 어떠한 만남을 이루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연인과의 사랑’도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영원한 신랑이 되시며, 우리를 신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와 사랑을 나누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적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을지라도,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을지라도, 때로는 연인과의 만남에서 실패했을지라도 주님 안에서 온전한 사랑의 만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만남과 사랑을 총합하시는, 아니 그 이상의 사랑의 만남을 예수님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은 생애 가장 큰 사건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삶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베드로가 바로 이런 위대한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을까요? 또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베드로는 자신의 동생인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처음 접하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예수님이 참 좋으신 분이며, 그분의 말씀이 인상적이고 인생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 그렇게 예수님과의 만남을 지속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께 인생 전체를 맡길 신앙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유대 종교의 랍비 정도로 여기던 그 찰나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에게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그는 당시 어부였습니다. 때문에 바닷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이렇게 요청하십니다. “이 배를 탈 수 있느냐? 그리고 배를 해변에서 조금 떼놓으면 어떻겠느냐?” 그러다 갑자기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네 그물을 깊은 데로 가서 던져라. 그리고 물고기를 잡아라.” 이는 당시 베드로가 직업 현장에서 갖고 있던 고민, 곧 그의 삶의 문제와 아픔에 예수께서 함께 참여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4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누가복음 5:4)


베드로가 늘 관심을 기울이던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물고기를 많이 잡을까? 어떻게 내 가족을 먹여 살릴까?’ 이와 같은 생존의 문제, 시급한 삶의 문제에 예수님이 참여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 들어오십니다. 인생에 대한 우리의 고민과 실존적 문제에 참여하십니다. 이후 나타난 베드로의 대답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5절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누가복음 5:5 중)


먼저 그는 “선생님!” 하고 주님을 부릅니다. 그러면서 어제 밤새도록 힘들게 물고기를 잡으려고 애썼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잡은 게 없다고 토로합니다. 이토록 갈구하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조차 없으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절박한 어부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실망으로 가득차서 탄식하고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믿음 가운데 순종할 때 역전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살면서 어떤 때는 예수님의 말씀이 잘 들립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아무리 들으려고 해도 그분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분의 말씀이 들리지 않을까요? 내가 잘 될 때, 잘나갈 때, 사람들 앞에서 높아지고 큰소리칠 때, 목에 힘 좀 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반면 어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까요? 건강하다 갑자기 몸이 아플 때,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가 나를 버리고 떠날 때, 직장에서 내 자리를 빼앗길 때, 가정에서 혹은 사회에서 내 위치를 잃을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즉 내가 실망하고 탄식할 때 비로소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베드도로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기다리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뭔가 잘 되고 있을 때는 제자로 불러도 따라올 것 같지 않으니, 그에게 삶의 문제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베드로가 삶의 위기를 맞았을 때,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면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거기서 고기를 잡아 보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이 또한 기이합니다. 어부는 베드로였고, 예수님은 목수였습니다. 그런데 목수이신 예수님이 어부 베드로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당연히 반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지금은 낮이라 깊은 데 물고기가 없어요. 지금 물고기는 물가로 내려오고 있어요.” 그럼에도 주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도대체 이분이 어떤 분이길래 이런 명령까지 하시는지’, ‘지금까지는 좋은 랍비로 알았는데 혹시 물고기 잡는 전문가이신지’ 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렇게 답합니다. 5절 후반부를 읽어 보겠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누가복음 5:5 중)


이 말씀은 두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첫 문장은 “내가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잡은 것이 없습니다.”입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이 들어가기 전에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역전의 접속사 곧 ‘그러나’입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큰 대문자로 ‘BUT’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씀에 의지해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는 대답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위대성입니다. 내 생각, 내 경험, 내 상식으로는 맞지 않는 일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그렇게 해 보겠다는 결단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이 역전의 접속사를 경험합니다. 이 접속사를 경험할 때,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신앙을 가지면 비상식적이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을 가졌으니 이성에 반하는 행동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느껴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해 보라는 뜻입니다. 한번 순종해 보고 따라보라는 뜻입니다. 

이 역전의 접속사 ‘BUT’이라는 단어를 가장 강력하게 사용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게 기도드리셨습니다. 한밤중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치열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 괴로운 십자가의 길, 고난의 쓴 잔을 받고 싶지 않다고 고백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며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결국, ‘BUT’이라고 말씀하시며,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실존 전체를 맡기며 기도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일상에서 역전을 경험해야 내 삶에서 신앙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또는 “주님, 저 이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하기 싫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해 보라고 말씀하시면 해 보겠습니다.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라고 도전하고 결단하며 나아가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존재론적인 변화를 경험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가 이런 고백과 결단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후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엇을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누가복음 5:6)


베드로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너무나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배가 물고기 때문에 내려앉을 정도로 가득 잡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저분은 단순한 랍비가 아닌 것 같아! 랍비 이상이야.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하겠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아닐까?’ 인간 예수에게서 하나님에 관한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갑자기 커다란 두려움에 붙잡힙니다. 8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누가복음 5:8)


이때 베드로의 몇 가지 변화가 포착됩니다. 그동안은 예수님을 수준 높은 사람, 선생 정도로 여겼는데, 이제는 그분이 ‘질적’으로 다른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태도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무릎 아래 바짝 엎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는 엎드리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엎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떻게 고백합니까? “당신은 나와는 다른 분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인간입니다. 당신은 거룩한 분이며, 나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을 드리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경배의 대상, 예배의 대상,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이어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는 호칭의 변화입니다. 5절을 보면 예수님을 향해 그가 “선생님” 하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겪은 후,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집니다. 바로 “주여”라는 호칭이 사용됩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즉 베드로는 이렇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당신은 단순한 랍비가 아니군요. 당신은 주님이시오, 하나님이시군요. 당신은 참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이렇게 베드로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호칭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변화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의 변화’입니다. 본 사건을 겪은 후,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존재론적인 인식의 변화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 나 쓸 만하지 않습니까? 능력도 많지요? 그러니까 한번 써 보세요. 하나님도 손해 안 보실 거예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쓰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지혜도 없고, 용기도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그에게 없는 능력과 지혜, 용기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며,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성경 속 인물들의 모습이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행적입니다. 

베드로 역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다고, 연약한 존재니 자신을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깜짝 놀란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놀람의 경험이 있습니까? 예수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영혼이 뛰며, 두렵고 떨림으로 놀란 경험을 해 보았습니까? 이 경험이 있어야 그분께 내 인생 전체를 드릴 열정도 생깁니다. 

신앙에 있어서 놀람의 경험이란 우리 삶의 추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경험은 진리 경험이자 생명 경험입니다. 바로 그 경험을 한 베드로도 새로운 것을 보는 눈, 새로운 것을 듣는 귀가 열리는 경험을 합니다. 그에게 들린 주님의 음성은 이렇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 관심, 네 인생의 목표를 좀 바꾸겠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 너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았느냐? 너의 중심된 관심이 무엇이었느냐? 물질이 아니었느냐?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느냐?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그것이 네 삶의 목표가 아니었더냐?”

베드로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큰 명예, 더 큰 권력이 인생의 주된 목표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게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인생이 그것만으로는 만족될 수가 없다. 그 이상의 꿈이 있어야, 그 이상의 비전이 있어야 인생이 인생다워진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 삶을 나에게 내 놓을 수 없겠니? 그러면 네게 하나님이 보일 것이고, 이웃도 보게 될 것이다.” 10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누가복음 5:10 중)


“그동안 물고기를 낚았느냐?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네 인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겠다.” 여기서 물고기란 무엇을 상징할까요? 물고기란 말을 기억할 때마다 이렇게 바꿔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물’은 ‘만물 물(物)’, ‘고’는 ‘높을 고(高)’, ‘기’는 ‘터 기(基)’로 말입니다. 즉 물질을 인생의 최고 가치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물고기를 취하는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고기에 천착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물질을 가장 높은 가치로 여기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의 인생을 변화시키십니다. 물고기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사람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이 제일 큰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도 사람 때문이며,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자로 택한 이유도 사람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워 주신 ‘하나님의 자녀’ 된 정체성을 기억합시다.


우리 인생에서 사람이 제일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을 만날 때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사람을 만날 때, 상대를 잠재적인 적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기피하고 신뢰하지 않습니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이는 좋은 인간관계의 태도가 아닙니다. 혹시라도 나에게 그런 태도가 있다면 버려야 합니다. 사람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한 경험이 있을지라도, 그런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한편 비교하면서 사람을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입은 옷, 타는 차, 거주지 등으로 사람을 비교하며 우월감과 열등감을 오갑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인생의 모습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야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사람을 사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사람을 만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을 그 자체로 사랑하셨습니다. “너는 너대로 존귀한 존재다. 너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특별한 존재다. 너는 너대로 가치 있고 너대로 인생을 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존재다. 너는 더 이상은 사탄의 억압과 죄의 억압 속에서 살지 말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라.” 이렇게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세워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다가오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서로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아내와 남편, 자녀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며, 하나님의 사랑 받는 귀한 존재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으며,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사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역사를 평생 동안 써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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