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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문내용

베드로(5),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2019-01-25 17:32:01
설교본문 (요 21:15~17)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부활하신 주님이 죄책감에 빠진 베드로를 찾아가십니다.


오늘은 베드로에 대한 다섯 번째 말씀으로, 이번 주일로 베드로에 관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새벽녘 닭이 울 때마다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한 기억 때문에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기억은 좌절의 탄식만으로 멈춰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를 새롭게 만드는 희망의 다짐으로 결단하는 계기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죽음을 택한 가룟 유다와 베드로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해 회복을 경험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그 과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삶도 베드로처럼 뒤엉켜 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인간관계 속에서 그러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부부도 다투고 싸우며 ‘내가 이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내가 낳은 내 자식인데도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부부 사이가 멀어지고, 부모와 자녀 관계가 틀어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친구들, 이웃과 갈등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그 과정을 어떻게 밟아 왔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베드로가 회복되는 장면은 우리에게 아주 신선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 전에 베드로는 얼마나 낙심했을까요?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만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죽을 각오를 하더라도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큰소리쳤던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주님을 모른다고 했고,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입니다. 그는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 바깥으로 나가 대성통곡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큰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신 예루살렘에 더는 머물 수 없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지,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갈등하며, 고향 땅인 갈릴리로 돌아와 하릴없이 물고기를 잡고 있던 모습이 오늘 본문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21장은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이 다시 만나는 장면입니다. 누구보다 베드로와의 만남은 굉장한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희망을 잃어버린, 낙심하고 좌절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는 마치 그를 꼭 회복시키려고 작성하신 것만 같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셨을까요? 이제 베드로가 회복되는 과정을 세 단계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와 식탁 교제를 나누십니다.


첫 번째는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만날 때 제일 처음 한 일이 무엇이었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만나셔서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즉 식탁 교제를 나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구절이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라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이 낙심하고 있던 제자들과 함께 밥상에 앉으셨다는 것입니다. 식탁 교제가 따뜻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친밀함의 표지입니다. 친구가 되었다는 표증입니다. 서로 만나 교제하고 소통하겠다는 표지가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식탁 교제를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먹고 마시는 자’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나눈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에 초대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와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눌 때, 그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비난했습니다. 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냐며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나라를 식사 공동체로, 잔치 공동체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무려 오천 여명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시는 장면도 나타납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우리가 마지막 날 하나님나라에 가게 될 때도 하나님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우리에게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장면이 어떨지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그때도 ‘잔치’임은 분명합니다.

우리 가정은 어떤 공동체입니까? 가정이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은 식탁 공동체, 먹거리 공동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먹고 마심이 가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단순히 잠자는 공간이 아닙니다. 하숙집도 아닙니다. 가정 공동체는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혹시 부부끼리 함께 먹고 마신 지가 언제입니까?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와 아들, 딸과 함께 식사한 적이 언제입니까? 가정은 먹음의 공동체입니다. 함께 공동 식사를 하는 장소입니다. 비싼 음식이 아니어도 괜찮지 않습니까?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먹어도, 밖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먹어도, 교회에 와서 삼천 원짜리 밥을 먹어도, 밥이 아니라 차 한 잔을 마셔도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 나눌 때, 그 가정이 진정한 가족 공동체이며 사랑의 공동체가 됩니다.

모든 변화의 시작은 먹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바로 이 식탁 교제를 통해 베드로가 가졌던 좌절감과 낙심을 풀어 주기 시작하십니다. 함께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친밀감을 느낍니다. 그 안에 교제가 일어나고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이 모범을 우리 주님께서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와 추억을 공유하십니다.


그렇다면 함께 식탁 교제만 나누면 다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후 두 번째 단계로 이어집니다. 베드로 안의 잃어버린 사랑을 주님이 회복시키려고 애쓰십니다. “네가 나에게 가졌던 처음 사랑, 그것을 기억하느냐? 나를 따랐던 너의 첫 마음과 결단, 그것을 기억하느냐?” 주님이 베드로로 하여금 첫 마음을 떠오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법으로 접근하십니다. 첫째는 ‘장소의 공유’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처음 만났던 장소가 갈릴리바다입니다. 그곳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추억이 담긴 장소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가 밤새 수고했는데, 얻은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어부인 베드로가 상황을 더 잘 알았지만, 그는 순종해 보자는 마음으로 깊은 데 그물을 내렸고, 그 순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수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부터 베드로가 예수님을 좇기 시작했습니다. 즉 이 갈릴리바다는 예수님과 베드로가 처음 만난 장소, 곧 추억의 장소입니다.

나아가 두 번째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본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그 이름은 ‘시몬’입니다. 1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요한복음 21:15 중)


옛날 처음 만났을 때, 베드로의 본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너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더냐?” 예전의 그 이름을 불러 주시니 베드로도 화들짝 놀랍니다. “베드로야, 네 본래 이름은 게바가 아니라 시몬이란다. 너는 본래 물고기 잡던 어부가 아니더냐? 그 촌에서 자라난 촌부가 아니냐? 본래 아무 꿈과 비전도 없었던 그런 인간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너와 내가 만나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의를 꿈꾸지 않았느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를 만드시겠다는 것을 너와 내가 함께 믿지 않았느냐?” 이러면서 예수님이 처음 사랑의 공유적인 마음을 회복시키십니다.

우리 인생의 출발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교개혁의 모토도 ‘아드 폰테스(ad fontes)’ 곧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회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부부간의 만남이 고통스러워지고 있다면, 때로는 부부가 처음 만났던 장소로 가보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서로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을 돌아보면서 가정의 회복을 기대해 보는 것입니다. 혹은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안 듣고 속상하게 할 때도 있지만, 그때 처음 자녀를 낳았을 때, 첫 생명을 가슴에 품었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이만큼 귀한 아이가 우리 가정에 왔다는 것에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했습니까? 하나님께 찬양하며 기도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를 것입니다.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을 나누는 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아픔이 해결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베드로가 있는 갈릴리바다로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베드로의 첫 이름을 부르시며 그의 마음을 알아주시고, 사랑의 추억을 되살려 주심으로써 회복을 도우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회복시키며 변화시켜 주십니다.


세 번째 단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입은 상처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기 어려웠습니다.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닌 예수님을 버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이 친히 안아주십니다. 그의 상처를 싸매주시며 치유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신의 언어를 사랑의 언어로 바꾸기 시작하십니다. 

사실 베드로는 세 번의 거절과 거부, 배신의 언어를 쏟아냈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알지 못한다고, 저주까지 일삼으며 배반의 언어를 뱉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 언어를 뒤집으십니다. ‘네가 나를 모른다고 했지? 그렇다면 세 번 나를 향해 다시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없겠니?’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세 번 연속해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시며, 그의 대답을 듣고자 하십니다. 1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7 중)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다 똑같이 질문하십니다. 그중 첫 번째 질문이 비교적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첫 질문을 하신 후, 다음에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얼마 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죄책감과 좌절감을 씻겨 주시기 위해, 그 억압으로부터 베드로를 해방시켜 주시려고 던지는 예수님의 물음입니다.

또한 주님은 이전에 비교를 일삼았던 베드로를 해방시켜 주시고자 합니다. 이전에 베드로가 어떻게 비교를 했습니까?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나만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저 사람과 나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주님, 저들하고 나를 비교하지 마세요. 나는 모든 것을 주님에게 걸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표현을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그런 결단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 중)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느냐? 네가 옛날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이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떠나가도 나는 안 떠나가겠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진짜냐? 아니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보다 내가 네게 첫 번째냐? 다른 어떤 것보다 내가 네게 우선권이냐?”라는 질문을 주님이 베드로에게 던지신 것입니다.

아마 예전의 베드로였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내가 누구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께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나만한 제자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자신만만했던 베드로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약점과 문제를 너무 잘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결심이 얼마나 빨리 무너지는가도 알게 되었습니다. 위기가 닥치면, 얼마나 비겁하고 치졸해지는가도 알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 한 가지입니다. 1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요한복음 21:15 중)


이 구절에서만 주님이 몇 번 나오는지 모릅니다. 주님, 주님, 주님! 이게 베드로의 심정입니다. 그가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전에 베드로는 자신을 앞세웠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자신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버려도 자신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 대신 ‘주님’을 부릅니다. 이 호칭을 각 절에서 세 번씩이나 반복하는 베드로입니다. 내 자신 중심의 신앙에서 예수님 중심의 신앙으로 베드로가 변화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향해 나갔다가 주님 앞에 돌아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드릴 때 주님이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나와 함께 먹고 마시자. 나를 먹고 마시라.” 그것이 성찬이며, 말씀을 펴서 읽고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말씀의 잔치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영적인 식탁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내가 잘못했던 것, 부족했던 것, 죄 지었던 것을 주님께 다 토해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거기서부터 사랑의 회복이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진솔한 고백을 들으시고, 우리를 회복시키기 시작하십니다. 그 가운데 우리도 베드로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가 비록 세상에 나갔을 때 실수했습니다. 주님을 모른 척했습니다. 내 욕심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죄송스러운 일들을 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제가 주님 사랑합니다. 이 사랑하는 마음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저의 실패도 아시지만, 저의 사랑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사랑 고백을 했을 때 치유와 용서의 축복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이 베드로에게 사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사랑 고백을 들으신 주께서 반복적으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15절 중 일부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요한복음 21:15)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 사랑 고백이 있은 후에 무엇이 보이기 시작합니까? 그동안에는 자기 자신만 보였던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것도 나 때문, 나를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 충성한 것도 내가 뭔가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믿음의 중심이 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 아십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니, 누가 보이기 시작합니까? 이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제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네가 이제 죽음에서 다시 사는 것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교회가 탄생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기억해라. 이 모든 사람들은 네 양이 아니다. 진정한 목자는 예수 한 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다. 그러므로 내 양이다. 네 양이 아니라 ‘내 양’을 치라. 네게 잠시 맡겨진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네가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듣게 하라. 말씀을 읽게 하라. 말씀을 묵상하게 하라. 말씀대로 살게 하라.” 


사랑만이 진정한 사명을 낳습니다.


이처럼 사랑만이 진정한 사명을 낳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명은 욕심과 야망의 구체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사명도 감당합니다. 특히 교회 사역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 욕심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교만이 득세해집니다. 사랑 없는 사명은 거짓 사명입니다. 자기 명예를 드러내기 위한 야망에 불과해집니다. 

베드로도 주님과의 만남에서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아, 이들은 예수님의 양이구나. 내가 수고하고 땀 흘려도 마침내 영광 받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시구나!’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베드로는 그때부터 자기중심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옮겨 갑니다. 자신만을 생각했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 이웃들을 위한 삶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때 베드로가 깨닫게 된 놀라운 사실은 ‘아, 예수님이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나도 이제 평생 주님을 사랑해야 되겠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요한일서 4장 18~19절 말씀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18~19)


신앙의 큰 기쁨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다가오심으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베드로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두려움 없는 사랑의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주님을 참 사랑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 대답이 ‘그렇다’이면 무엇이든 해도 좋습니다. 어떤 직장이든 괜찮습니다. 어떤 사업이든 해도 괜찮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주님을 사랑하느냐’라는 그 마음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내게 맡겨주신 이 자리가 하나님의 허락하신 자리요, 내가 만나는 사람이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사람입니다. 그때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일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을 충만히 드리며, 마음껏 두려움 없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뻐하면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도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들을 맡겨 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삶에서 경험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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