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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문내용

모성의 사랑에 빚진 자 - 모세 이야기 1 -

2018-12-12 13:27:40
설교본문 (출 1:22~2:10)
물리법칙은 우주는 무질서와 파괴로 나아간다고 이야기합니다.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물리법칙 두 가지 중 하나는 에너지의 형태는 바뀌어도 그 총량은 같다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주의 엔트로피(entropy)가 항상 증가하고 있다는 열역학 제2법칙입니다. 이것은 자연계에서 에너지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를 설명합니다. ‘엔트로피’는 에너지가 전환되고 있다는 의미로, 이것이 항상 증가한다는 것은 무질서가 증가한다는 뜻입니다. 곧, 자연은 서서히 무질서와 파괴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물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 전체가 같은 농도에 이르도록 계속해서 퍼져 나갑니다. 생수에 구정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 생수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 이런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잘 조직된 나무가 불에 타면 열이 발생하고 나무의 조직들이 와해됩니다. 즉, 엔트로피가 높은 재, 무질서의 물체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나무는 더 이상 땔감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의하면 자연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무질서한 것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새 생명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현상이 사라지고, 우주는 이른바 종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가 멸망하지 않고 계속 생성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리학에 문외한인 저에게, 이 우주가 엔트로피가 증가하면서도 멸망하지 않고 존속하는 것은 어디엔가 가장 강력한 에너지가 존재하기 때문인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그 에너지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질서와 파괴를 막는 힘이 있습니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역행하는 것들은 주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산불이 나서 산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곳은 황폐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다음 해가 되면 흙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실상은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더 큰 무질서가 나타나야 함에도 말입니다. 어디엔가 파괴를 막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태양 에너지입니다. 

 태양에서 다량의 에너지가 방출되어 지구에 이르면 식물들은 그 에너지를 받아 생명의 잉태합니다. 이것은 동물과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있지만 동물의 세계, 인간의 세계에는 이것을 극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십시오. 동물들이 새끼를 낳기만 하고 그냥 내버려 둔다면 아마 한 시간도 안 돼서 사나운 짐승에게 먹혀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미의 노력과 새끼의 노력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새끼들은 태어나서 5분에서 10분, 적어도 30분 안에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미를 쫓아 걷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사람은 태어나서 스스로 일어나 걷기까지 무려 일 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이토록 연약한 존재가 어떻게 생명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한 가지로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랑입니다.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무질서가 커지는 파괴의 세계가 점점 커짐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생명이 누리고 있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의 에너지가 인간에게 주어질 때에 인간은 생명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누구의 사랑입니까? 바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젖을 먹이고 대소변을 갈아주고 먹여주고 길러주는 어머니의 사랑.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비결입니다. 

 싸움과 전쟁이 시작되면 질서 있는 모든 것들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미움과 분노가 들어오면 엔트로피가 순식간에 증가하여 파괴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인간의 사랑, 모성애가 들어오게 되면 무너짐의 상황 속에서도 생명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세계는 엔트로피의 증가와 사랑의 힘이 맞부딪히는 현장인 셈입니다. 미움과 분노의 힘과 사랑의 힘이 매일 우리의 삶에서 맞부딪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우리가 이렇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사랑의 에너지가 미움의 에너지보다 더 크다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파괴와 사랑의 힘을 동시에 만납니다.



 모세의 출생에서 이 두 가지 힘이 부딪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태어나기 전, 바로 왕은 강력한 힘을 통해 생명을 거부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유대인들을 죽이는 미움과 분노의 명령이었습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미움과 분노의 힘은 아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출애굽기 1:22)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백성’이란 애굽 백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유대 백성을 뜻합니다. 

 가부장적인 사회, 권력지향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생명의 가치와 인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오직 재산의 가치로만 여성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딸이거든 살려두라’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가치관을 가진 다른 민족의 남자는 적대자고 원수일 수밖에 없기에 노예로 삼든지 아니면 아예 가차 없이 죽이라는 것입니다. 반란과 저항의 씨앗을 원초적으로 끊어버리기 위한 명령이었습니다. 

 이런 위기의 상황, 생명의 존속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한 이스라엘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여인은 위협적인 엔트로피가 확대되어 무질서와 멸망의 세계로 들어가는 삶의 자리에 놓였지만, 그것을 저항하며 생명을 만들어 가는 사랑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출애굽기 2:2)



 모세가 태어났는데, 그를 ‘잘생겼다’라고 표현합니다. 남자아이에게 ‘잘생겼다’는 말을 한 적이 있으신가요? 남의 자식에게는 예의 삼아 말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열 달 동안 뱃속에 품고 있다가 산고를 통해 낳은 아들은 어떻게 봐도 잘생겨 보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훤하게 보이더니 자세히 볼수록 눈도 잘 생겼고 이마며 턱, 코도 잘생겨 보이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잘생겼다’는 말의 본래 뜻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들고 그것들을 보시며 “좋구나!” 하실 때 사용하신 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good’입니다. 선하고 좋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 감탄사가 모세를 낳았을 때 그의 어머니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만 그를 그렇게 본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7장 2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사도행전 7:20)



 하나님의 눈에도 모세가 멋져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잘났다는 것 이상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기 모세를 통해서 새로운 창조를 준비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이 아기를 통해서 애굽 백성에게 억압받던 유대 민족을 자유로운 민족, 새로운 민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민족으로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결단과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에게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왕의 명령을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남자아이를 낳으면 나일 강에 던지라고 하는데 이 아들을 어떻게 할까?’ 어머니는 고민했습니다.  



더 숨질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가 갈대 사이에 두고 (출애굽기 2:3)



 바로 왕을 이길 지혜와 전략이 필요했습니다. 석 달 동안은 잘 숨겼습니다. 그런데 아기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자 다른 이들이 아기가 남자아인지 여자아인지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곧 들통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선택해야 했습니다. 나일 강에 던져 죽이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도 왕명 불복종의 죄로 죽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머니에게는 생명을 살리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수단과 방법, 지혜를 동원합니다.



두 여인의 사랑과 용기가 모세를 살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뜻은 인간이 움직이기를 요청합니다. 인간이 지혜를 가지고 생각하고 연구하기를 요청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수고하고 땀 흘리면서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찾기를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믿음의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어머니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모세에게는 미리암이라는 누이가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딸은 의논했습니다. “이 아들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기울이자. 마지막 기회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 그냥 버려서는 안 된다. 얘야, 갈대를 꺾어 와라. 갈대 상자를 만들자.” 모녀는 갈대 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상자를 덮는 뚜껑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세를 넣고 강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살아남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암에게 이야기합니다. “바로의 딸인 공주가 때때로 나일 강에 나와 목욕을 한다는 소문이 있지 않더냐? 언제, 어디서 공주가 목욕을 하는지 좀 알아봐라. 시간과 장소를 알아본 후 갈대 상자를 그 옆에 둬서 공주가 상자를 볼 수 있게 해라. 그리고 네가 그 뒤를 따라가면서 그것을 지켜봐라.”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으면, 그냥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구나. 생각해야 한다. 신앙은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하나님 앞에 아뢰면서 준비하는 것이다. 필요하면 지략을 구하고 전략을 꾸미고 노력하고 수고하며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한다!’ 

 이 여인들은 그러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애굽 공주가 그 갈대 상자를 보았고 뚜껑을 열어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잘생긴 남자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의 딸에게는 모성애가 있었습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동정심이 있었습니다. 아기를 보자 그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출에굽기 2:6)



 공주는 그 아이가 이스라엘 사람의 남자아이인 것을 알았습니다. 히브리 남자아기를 죽이라고 한 아버지의 명령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의 우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인 공주는,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때 미리암이 지혜와 용기를 갖고 공주 앞에 나갑니다. “이 아이에게 젖을 줄 유모를 구해와도 되겠습니까?” 모든 상황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미리암은 자신의 어머니, 곧 모세의 친어머니를 데려옵니다. 이후 모세는 공주의 양아들이 되어 자신의 친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자라게 됩니다. 



사랑과 배려가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힘입니다. 



 모세의 생애를 보면 처음부터 잘나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태어나자마자 위기를 만납니다. 살 수 있는 확률은 0%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벼랑에 서 있는 그를 살리시고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공적인 허락을 받아 자신의 어머니에게 양육을 받는 권리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출생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지도자가 될 때까지, 어리고 어렸던 모세를 향한 여성들의 담대한 믿음과 헌신, 지혜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여인들은 모두 용기 있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여인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여인, 생명을 살리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저는 종종 부모님의 사랑과 나를 곁에서 지켜준 이들의 사랑 때문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소망교회에 와서 얼마나 많은 분들의 사랑과 기도의 빚을 지고 있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의하면 모든 것이 황폐화되고, 모든 것이 죽음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이 나이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사랑과 긍휼, 배려와 도움 때문입니다. 지나온 과거를 생각해 보면 놀랍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와 지금 내 모습이 얼마나 다릅니까?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니던가요? 어렸을 때 꿈꾸던 것과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다릅니까? 지금 이 자리까지 올 것을 예측한 사람이 있습니까? 

 인생이란 때로 완성되지 않은 퍼즐처럼 조각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흩어진 조각들 중에는 깜깜한 것, 구렁텅이, 잡다하고 지저분한 것들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을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으로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내며 탄식하고 불평하고 투덜댔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면서 흩어져 있던 인생의 조각들, 불평했던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도우셨구나! 그때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 내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셨구나.’ 하나씩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퍼즐이 완성되는 것과 삶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인생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 내 삶이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을 졌음을 기억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10)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진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사랑 때문에 여기까지 온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임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포기하면 안 됩니다. 무너지면 안 됩니다. 이제 끝이라고, 가망이 없다고 내려놓으면 안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 무엇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이 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예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생명이,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통해서 여기까지 이어진 것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기쁨입니다.

 남은 인생 동안 내가 주변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임을 기억하고 그것에 감사하며 받은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귀한 생명의 축복, 사랑의 빚진 자로서 살아가는 은총을 누리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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