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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의 영, 충성의 영? - 성령과 악령 11 -

2018-12-12 13:27:40
설교본문 (막 14:43~50)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배반의 영, 충성의 영?’입니다. 배반과 충성은 민감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배반과 충성의 현상을 자주 목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로부터 배반과 충성을 직접 경험하셨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가 무엇에 충성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붙잡히기 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당시 민중들은 예수님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면 뒤따라가다가 그분이 기적을 보이지 않으시면 매몰차게 떠났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참을 만하셨습니다. 하지만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 떠날 때,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셨을까요? 예수님께도 큰 아픔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42절에 보면, 예수님이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전개될지 알고 계셨습니다. 즉 가장 아프고 슬픈 사건이 임박했다는 것을 인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배반할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죽게 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곤 그 밤,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피와 땀을 흘리며 처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끝나기 무섭게 횃불과 몽둥이를 든 일당이 예수님에게 들이닥쳤습니다. 곧장 예수님을 체포했고,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 받도록 끌고 갔습니다.

 예수님도 마지막 순간엔 모멸감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땐 큰소리쳤는데, 이제 그 모습이 온데간데없습니다. 비겁한 모습만 보입니다. 아주 무능하고 비열한 모습입니다. 배신자의 모습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50절이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50)



 여기서 제자들이란 남자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도망갔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자신했던 이들입니다. 그토록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 이처럼 허망하게 무너져 내립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이들은 예수님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안 믿던 자들이 그분을 배반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며 충성을 맹세하던 이들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서 용납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그토록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는데, 이렇게 일순간 변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은 크게 세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 마음은 원이었지만 육체가 피곤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충성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에 피로가 누적될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은 분명히 있는데 기도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충성하고 싶고 헌신도 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됩니다. 마가복음 14장 38절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가복음 14:38 중)



 분명 깨어 있기를 원하지만, 육신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변화산에서 잠든 제자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여러 차례 깨어 있을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하지만 곤하게 잠든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용납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막14:41)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음에도, 몸이 힘들고 피곤해서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새벽 기도에 나가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고, 교회 봉사에 헌신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은 정말 원하는데 육체가 따라주지 않습니다. 피로가 누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때는 쉬어야 합니다. 잠도 자둬야 합니다. 선지자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450명의 바알선지자와 대결하고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위협하자 놀라 도망갑니다. 로뎀 나무 아래 들어가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라고 한탄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잠을 주셨습니다. 깊은 잠에 빠진 그가 잠에서 깨어나자 머리맡에는 먹을 게 준비돼 있습니다. 그 음식을 먹고 나니 다시 가야 할 길을 일러 주십니다. 이처럼 육체가 피곤하고 곤고할 때는 쉬어야 합니다. 잠도 자고 맛있는 음식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런 어려움은 용납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뜻대로 충성하지 못하고 배반할 때가 있는데, 이는 두려움이 엄습할 때 그렇게 됩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그는 절대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끝까지 목숨을 걸고 주님을 지킬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시자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심이 생깁니다. ‘나도 저런 재판을 당하면 어떻게 될까? 나도 처참한 죽음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공포심에 붙잡히자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주변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고 연속해서 물어왔지만, 연신 예수님을 모른다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며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닭이 두 번 울자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인지했고, 이후 한참을 슬픔과 한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니 너무 미안하고 죄송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니 형편없는 사람이란 생각도 듭니다. 스스로가 한심해 울고 또 울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75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태복음 26:75)



 그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회복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가 눈물로 통곡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회개했다는 뜻입니다. 이 회개로 인해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오셔서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우리도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익에 따라 충성의 대상을 바꿨습니다. 



 세 번째 경우는 다릅니다. 이는 의도적인 배반, 곧 준비된 배반입니다. 성경에서 누구를 예로 들 수 있습니까? 가룟 유다입니다. 놀랍게도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알았음에도 베드로처럼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통곡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후회는 했습니다. 안타깝게 여기며, 자기연민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의도적인 배반 속에 무엇이 들어가 있습니까? 바로 사탄의 역사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더욱 굳게 만들었습니다. 회개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탄의 역사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죄를 지었음에도 눈물이 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앎에도 통회하는 심정이 생기지 않게 한다는 말입니다.   

 유다가 그랬습니다. 유다는 당대 종교적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지도자들과 한패가 되어 예수님을 붙잡는 데 공모했습니다. 이른바 내부 고발자가 된 것입니다. 우정이란 가면을 쓰고 의도적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을 배신했습니다. “랍비여!” 하고 예수님을 부르면서 그분을 팔아넘겼습니다. 오늘 본문 중 44~45절은 당시 모습을 압축적으로 묘사합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마가복음 14:44~45)



 의도된 사기극입니다. 서로 다 짜고 움직였습니다. 자신이 입 맞추는 자가 예수라고 하며, 예수님에게 나가 ‘랍비’라고 부르며 입을 맞췄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입을 맞춘다는 것은 친밀감의 표시입니다. 사랑과 존경이 담긴 인사법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 인사를 위선의 표지를 이용했습니다. 배반의 입맞춤입니다. 사랑과 존경 대신 비열함과 속임수를 마음에 품고 예수께 입을 맞춘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와 같은 못된 입맞춤의 예가 나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입맞춤입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형의 모습으로 위장을 하고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 앞에 섭니다. 그리곤 아버지 이삭에게 거짓 입맞춤을 하며 형의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그랬습니다. 그는 정치적 입지를 높이기 위해, 아버지가 갖고 있던 권력을 빼앗기 위해, 또 아버지에게 향했던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백성들에게 입맞춤하며 그들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렸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아들이 압살롬입니다. 



잘못된 충성의 결말은 비극입니다.



 가룟 유다는 아주 똑똑한 인물입니다. 지성적이며 열정도 대단했고, 분별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공동체의 재정적인 책임을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뒤따라가면서도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자신이 변화되려고 한 게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던 이념을 예수께 주입하며 예수님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대로 예수님이 움직이시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 사탄이 가룟 유다의 마음을 유혹하고 사로잡았습니다. 악령의 역사가 가룟 유다를 붙잡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한복음 13:2)



 사탄의 공격 장소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 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잘못인 줄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룟 유다의 충성은 이기적인 충성입니다. 늘 자신의 욕심이 예수님의 요청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에겐 예수님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자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즉 가룟 유다의 충성은 뒤틀린 충성입니다. 그는 스승에게 끊이지 않게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충성심은 타락한 충성심입니다. 마지막 순간엔 스승을 은 30에 팔아넘겨버립니다. 은 30이란 당시 노예들의 몸값 정도였습니다. 그 초라한 몸값에 스승을 팔아넘긴 것입니다.

 또한 가룟 유다의 충성은 위험한 충성입니다. 그는 자기 생각에 매몰돼 있습니다. 잘못한 것을 알면서도 자기연민에만 빠져 자살의 길로 갔던 어리석은 충성가입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에게 많은 차이가 있지만, 마지막 순간에 집중해 비교해 보면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눈물로 통곡했지만, 가룟 유다는 눈물을 쏟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베드로는 회복될 수 있었지만, 가룟 유다는 비극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는 그저 분개했습니다. 후회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눈물 없는 자살의 길로 삶을 종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 중 하나가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영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지 않게 합니다. 만약 우리가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중에 눈물이 맺히고 가슴에 회개의 영이 가득함을 느낀다면, 이것이야말로 복 중의 복입니다.



건강한 저항은 개혁의 씨앗이 됩니다.



 오늘의 언어로 말한다면, 가룟 유다는 내부 고발자입니다. 내부 고발자가 얼마나 위험합니까? 권력 사회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공동체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부 고발자들이 다 나쁜 사람들입니까? 배반자입니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배반과 충성에 대한 주제를 생각하면서 확인해야 할 게 더 있습니다. 변화와 개혁이란 내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500년 전 독일 땅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르틴 루터, 그는 내부 고발자였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의 부패와 불의를 보면서 그는 비텐베르그 성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했습니다. 교회와 신학에 문제가 있음을 비판적으로 제기했습니다. 그것은 변화와 성숙을 위한 문제 제기였습니다. 그러나 당대 교황청은 그 반박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내부 고발자로 그를 낙인찍었습니다. 그는 파문까지 당하게 됩니다. 그 후예들을 ‘저항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란 저항하는 사람들이란 뜻이 담긴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저항과 비판을 통해 부패한 종교계에 변화와 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오늘 우리가 그 후예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회퍼라는 목사님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독일 나치 정권의 히틀러의 만행을 지켜보며, 히틀러를 제거하고자 한 작전에 가담했습니다. 즉 그도 내부 고발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무너지고 인간 존엄성이 파괴당하는 것을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목사임에도 히틀러 암살 작전에 동행했습니다. 기도하면서 행동했습니다. 말씀을 보면서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작전을 시행하기 전, 이 사실이 발각됩니다. 그래서 독일 패망을 얼마 앞둔 시점에 처형당하고 맙니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내부 고발자였습니다. 왕과 제사장의 부패와 타락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인물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입니다. 힘 있는 자들을 고발하는 것은 늘 위험합니다.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당시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내부 고발자였습니다.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사회 지도층을 향해 예수님은 독설을 퍼부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시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물론 소통하게 되면 문제 제기를 해도 변화와 성숙이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소통을 거부하고 문제 제기와 비판적 관점을 모두 차단하면, 누군가는 배신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어느 순간엔 혁명가가 돼 있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충성이라는 것, 진정한 충성이란 편파성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충성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충성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충성하기로 선택해야 할 분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럼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거절해야 합니까? ‘사탄’을 거절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었다면, 사탄의 노예가 되는 것을 과감히 포기해야 합니다. 사탄을 향해 거절하고 그의 유혹을 무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충성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되묻고 방향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충성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민주주의의 좋은 점이 무엇입니까? 비판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판을 자꾸 닫으려 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충성은 하는데 억지 충성을 하게 됩니다. 가짜 충성입니다. 우리가 북한의 권력자를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모든 비판 세력을 제거합니다. 어떤 문제 제기도 하지 못 하게 합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폐쇄적인 집단일 뿐입니다.

 충성이란 무엇입니까?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옳은 길이라고 판단해 결단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충성은 신뢰와 함께 갈 수밖에 없습니다. 충성에는 지혜와 분별력도 필요합니다. 또 용기 있는 자가 충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충성의 또 다른 면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한다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우리도 미워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충성이며 진정한 믿음이고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너는 네 상관을 위해 충성할 것이냐? 아니면 공동체가 지향하는 본질에 충성할 것이냐?”, “너는 네가 속한 조직에 충성할 것이냐? 아니면 그보다 큰 보편적인 정의에 충성할 것이냐?”, “너는 정권에 충성할 것이냐? 아니면 국가와 국민에 충성할 것이냐?” 만약 양자가 함께 간다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둘이 서로 부딪히면 곤혹스럽게 됩니다. 교회에서 목사에게 충성할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할 것인지를 묻는다면, 대답은 명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해야 합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끊임없이 가진 고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며 신앙의 삶을 이어 나가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충성해야 할 분이 누구인가를 되새기기 위해서입니다. 내 아내보다, 남편보다 소중하신 분, 내 아들과 딸보다 더 소중하신 분,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하신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겠다는 마음을 되새기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 매순간 확인합니다. 내 삶의 주인이 누구시며, 우리가 진정으로 섬겨야 할 분이 누구신가를…. 이처럼 예배란 충성의 우선순위를 재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깡패 집단이 서로 의리를 지키는 것, 그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질서를 위한 일종의 집단적 협약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충성에 위치한 사람들입니다. 자발적인 충성, 신뢰가 담긴 충성, 사랑의 충성의 자리에 우리가 초청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는 판단력과 분별력, 지혜가 필요합니다. 옳다고 판단되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온 우리에게 이러한 지혜와 용기를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마음을 품고 가정과 교회, 직장과 사회에서 더욱 신실하고 충성된 삶을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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