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2),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2018-12-12 13:27:40
설교본문 (계 2:8~11)
고난을 버린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두 번째 교회인 서머나 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던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9절에도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환난과 궁핍이란 죽음까지 이르는 고난을 뜻합니다. 사방이 고난이라는 장애물로 막혀 있는 서머나 교회의 상황입니다. 아마 구체적으로 세 가지 난관에 봉착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먼저 서머나 교회는 같은 뿌리로 여겼던 유대인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었습니다. 9절을 이어 살펴보면,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당시 유대인이란 빌미로 서머나 교회에 쳐들어와 그들을 괴롭혔던 사탄의 회당 같은 존재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거대한 로마 제국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퀴리오스’ 곧 ‘주’로 숭상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퀴리오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서머나 교회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그중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순교에 앞장선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머나 교회는 세 번째 난관에 봉착합니다. 그들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이런 고난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는 게 정말 가능할까? 그 길은 얼마나 힘든 길인가? 정체성을 지키면서 고난의 길을 계속 갈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서머나 교회인가?’ 이렇게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잊어버린 사실이 있다면, 고난 속에서 그리고 고난을 뚫고 이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는 고난 가운데 성장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과 신앙의 선배들 덕분에 오늘의 한국 교회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헌신하신 자리에서 꽃이 피고 열매 맺은 한국 교회입니다. 그런데 후배들인 우리가 그 고난의 시간과 아픔을 기억하지 못하고, 현재의 풍요에 만족하려 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기복주의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복을 비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축복하시는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고난을 잊고 축복만 찾아나서는 태도입니다. 교회는 고난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을 기억하지 않는 풍요는 진정한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 없는 축복을 원하는 교회는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만의 복을 쌓아두는 교회는 변질되기도 쉽습니다. 그런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인 교회가 아니라, 영적 지도자가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이며, 한국 교회가 흔들리는 주요 원인입니다.
믿음의 교회란 세상 ‘속’에서 분투하는 공동체입니다.
히틀러 나치 정권에 저항했던 본회퍼 목사님은 <자유를 향한 길>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내게는 두 가지가 중요하다. 우리 밖의 죽음과 우리 안의 죽음이다. 밖에서 오는 죽음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두려움을 주는 적이다. 그러나 우리 내부의 또 다른 죽음, 우리 자신의 죽음이 있다. 그리스도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죽는다.”
육체적 죽음은 누구나 맞이합니다. 젊을 때 죽음을 맞이하는 분도 있고,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이하는 분도 있습니다. 분명한 건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육체적인 죽음 외에도 또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죽는 죽음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생명이신 하나님을 저버릴 때 우리는 죽습니다. 의의 길을 저버리고,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 때 우리는 죽음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죽음은 어떻게 극복될까요? 육체적 죽음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시면서 우리에게 부활 생명을 약속하심으로 극복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자리에 참여할 때 우리도 첫 번째 죽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죽음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나아갈 때,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눌 때,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실 때, 우리가 죽음을 넘어 이웃을 향한 새 생명으로 꽃피워 나갈 수 있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현실에서 물러나 세상과 격리된 고귀한 영혼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현실을 경험하고 그 모든 고난을 겪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살펴봐도 그렇습니다. 이 땅은 정치적인 음모와 계략이 난무한 곳입니다. 종교적인 위선과 거짓이 가득한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앙인들이 세상과 격리된 채 살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때로는 고난을 받아도, 그 현실을 직면하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란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며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랑하며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고통 받는 자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미셨습니다. 죄인과 함께 식사 교제도 나누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만나주셨으며,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자들을 찾아가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선언하시며 부활의 소망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당대에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교만해진, 자기 탐욕만을 채우는 종교지도자들과는 격론을 벌이셨습니다. 그들과 갈등하셨는데,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의 길에 들어서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예수님에게 착각과 오해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도전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비난했고 조롱했습니다. 그 놀라우신 예수님을 좁은 세상이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너무 강력해서 그분을 뒤따르는 사람도 많았지만, 동시에 반대 세력도 어마어마했습니다. 반대 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자신들에게 타협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러면서 협박과 위협을 일삼았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가게 되셨고, 결국 십자가를 짊어지고, 거기에 못 박혀 죽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난을 이기신 생명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이 서머나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생명의 주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서머나 교회를 가르치십니다. 특별히 서머나 교회는 꾸중도 받지 않은, 칭찬과 격려를 받은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교회를 향해 이렇게 격려하십니다. “네가 고난을 당하고 있구나. 네가 세상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구나. 네가 세상에서 찌꺼기처럼 나뒹굴고 있구나. 그러나 나는 너를 알고 있다. 나는 너의 환경을 알고 있다. 네가 당하고 있는 고난과 슬픔을 알고 있단다. 네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를 알고 있단다. 네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좌절하고 낙담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단다.” 9절 말씀을 이어서 읽겠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요한계시록 2:9 중)
여기서 주어 ‘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환난과 궁핍, 오늘 우리 교회 성도님들의 고난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참 위로가 됩니다. ‘나를 알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기쁨이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세상은 나를 잘 모르는데, 내 남편과 아내도 나를 잘 모르는데, 나를 낳으신 부모님도, 내 자녀도 나를 잘 모르는데, 내 친구들도 나를 잘 모르는데, 주님이 나를 아십니다. 나의 아픔과 슬픔, 외로움, 고통을 주님께서 다 아신다고 합니다. 더욱이 교회 공동체에서 신앙을 지키며 그로 인해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자들을 주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위로를 더하십니다.
특히 주님이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시면서 위로하십니까?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시간의 시작이자 마지막이 되시는 주님입니다. 우리 주님은 창조주면서 마지막 심판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위대하시고, 세상 모든 것의 주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주님은 자신을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표현하십니다. 모든 것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죽음’, 바로 거기서 일어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생명으로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부활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난도 내게 맡겨라. 죽음도 내게 맡겨라.” 오늘 말씀 중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요한계시록 2:10)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고난이 임할 때 도망가지 말고 비겁해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 앞에 직면하라고 하십니다.
고난에 ‘직면’할 때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고난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난이 다가올 때 고난을 무시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고난을 무시하면 할수록 고난이란 현실이 우리 삶을 더욱 몰아세웁니다. 눈을 질끈 감고 고난을 무시하려 하지만, 눈을 뜨면 코앞에 닥친 고난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좌절을 경험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대하는 두 번째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바로 고난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쉬운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고난 앞에 서셨을 때, 그 고난을 피할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더욱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고난을 나누기도 하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공동체 원에게 기도 제목으로 내놓기도 합니다. 이것 자체가 굉장한 축복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닥친 고난은 내 스스로, 나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그랬습니다. 고난이 닥쳤을 때 홀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이신 하나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 모든 아픔과 슬픔, 고난과 역경의 내용을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면서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늘어나며, 하나님을 통해 위로를 얻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기도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녀는 수많은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예수님, 나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높임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명예롭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칭찬 받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더 우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낮아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멸시 받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책망의 두려움으로부터,
비방 받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잊혀짐의 두려움으로부터,
실수의 두려움으로부터,
조롱 받음에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욕망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욕망이 상실되면 두려움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기도하면서 매일매일 잘못된 욕망과 두려움에서 해방되기를 바랐습니다.
고난 뒤에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고난이란 우리의 기도를 시작하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삶에 고난이 없으면 우리 입에서 기도가 터져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저 모든 게 원래대로 잘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깨닫습니다. ‘아, 이것이 내 것이 아니구나. 이건 선물이구나. 지금까지 익숙했던 것이지 내 소유가 아니구나. 하나님의 축복이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 상황은 초대 교회 상황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정치‧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핍박 받지는 않습니다. 부분적으로 가정에서 그런 경우를 당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나라와 의를 위해 우리의 삶이 쓰임 받기 위해 다가오는 세상과의 부딪힘입니다. 또한 때때로 닥치는 작은 고난들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무능함에 대한 두려움, 거부에 대한 두려움,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평안을 빼앗습니다. 우리가 나이 들어가는 것도 두려울 수 있습니다. 계속 건강을 지킬 수 있을지, 주의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이 사회에서 퇴물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닐지 염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삶에 감사하는 것도 나 자신이고, 삶에 불평하는 것도 나 자신입니다.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마음속에 기쁨과 찬양을 회복할 수도 있습니다. 고난의 과정과 순간에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가 악과 불의에 저항하고 있다는 증표이자 축복입니다. 또한 고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으므로,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난은 어제의 나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 축복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나아가면 우리는 성숙의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난당하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에 직면하고 부딪쳐라. 내가 너와 함께하고 너의 모습을 알고 있다.” 본회퍼 목사님은 감옥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내게 참으로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 또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지난날 하나님이 많은 복을 주셨음을 고백하며, 이제 당하는 고난도 겸허히 수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교수형의 자리에 드신 본회퍼 목사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두려움을 갖게 되면 모든 생각과 행동이 마비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없는,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존감과 믿음을 상실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마지막을 기억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끝이 아닌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새 생명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에게도 그 생명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가지며 도전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10 중)
죽음 뒤에 하나님의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난을 이길 수 있고,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과 기쁨, 감사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점에서 고난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마지막 죽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허락되고 진정한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으며, 살아 있음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축복된 믿음 안에 살아가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